성숙은 동요에서 출발
역경 딛고 일어서자
참으로 아슬아슬한 인생이다. 멀쩡하던 친구 하나가 덜컥 중환자실에 누워버렸다. 대학원 시절을 함께 보낸 그 지음(知音)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 받았다는 소식을 받고 놀라 그의 부인에게 전화했다. 통화 말미에 신음하듯 내뱉는 부인의 말. “나쁜 사람이예요 …” 그 절절한 부부애가 아프게 꽂혀왔다. 무슨 말로 위로하랴. “그래요, 나쁜 사람입니다…” 여러모로 돋보이던 사람이다.
흥이 나면 즉석에서 휘갈기는 수준 높은 한시(漢詩)로 경탄을 자아내게 하던 친구. <주역>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대학 취업의 인연이 자꾸 비껴가자, 평소 관심 있던 한의학의 길로 발길을 돌렸던 사람. 몇 년 전 한의학과에 학사 편입하여 그 탁월한 역량과 적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공부에 몰두하던 그가 이렇게 허망하게 쓰러졌다.
평소 그를 아끼던 우인들의 기원 속에 그는 지금 생명의 고비를 넘기고 있다. 울산에 온 후 멀리 떨어져 있음을 핑계로 전화만 몇 번 주고받던 내 얄팍한 우정이 초라하기만 하다.
나는 평소 인간에 대한 어떤 형태의 계층적 선호에도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대학 시절, 정의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며 계급적 적대감을 이념적으로 키워 가는 마음들이 내게는 깊이 공감되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증오를 정당화시키는 사상과 이론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곤 하였다. 그런데 살다보니, 굳이 편향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마음이 쏠리며 각별히 주목하게 되는 인생살이가 부각된다.
세상사 잘 풀리는 사람들의 그 느긋한 풍요도 보기 좋은 것이긴 하나, 막히고 헤매며 비틀거리는 삶들의 그 긴장된 결핍에 더욱 눈길이 가게 된다. 자비나 동정에 이끌림이 아니다. 그 결핍의 상황이 자아내는 ‘문제 해결과 향상의 건강한 긴장감’ 때문이다. 모든 성숙은 안정보다는 동요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안정과 질서가 흔들릴 때 새로운 평안과 질서를 향한 문이 열린다.
배불러 긴장 풀린 돼지보다는 배고프지만 불안과 씨름하는 소크라테스가 생명의 희망이 되는 법. 한 세상 시작할 때보다 마감할 때가 조금이라도 더 향상된 마음, 깊어진 존재이려면, 우리는 특별한 복에 눈떠야 한다. 향상을 위한 불안, 그 동요의 불편을 복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결핍의 삶은 그래서 축복일 수 있다. 실패, 가난, 병, 그 모든 결핍의 모습으로 나투는 ‘향상 보살’을 만나야 한다. 그저 실패를 성공으로, 가난을 부귀로, 병을 건강으로 대치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결핍은 축복일 수 없다. 결핍을 소유의 풍요로 채우고 만다면, 결핍은 언제나 불행과 재난일 수밖에 없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결핍을 소유로만 채우고자 급급하는 경우는 그 거들먹거리는 보상 심리로 인해 오히려 존재가 빈천해 진다. 반면 불안과 아픔을 통해 존재의 보편적 결핍에 눈뜬 분들은 그들의 성취를 ‘진리 구현의 도량’에 회향시켜 간다. 같은 결핍에서 출발하지만, ‘차지하려는 야심’과 ‘성숙하려는 의지’는 이렇듯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온갖 상실과 동요와 고통에 꺾이지 않고, 그 결핍을 생명 향상의 가교로 삼는다면, 결핍은 분명 인생 최고의 특별한 축복이 되리라. 고성제(苦聖諦)야말로 그런 뜻을 담고 있지 않은가.
‘삶의 결핍(苦)’을 축복(滅, 해탈된 생명)으로 연결하는 길이 사성제(四聖諦)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던가. 부처님이야말로 ‘결핍의 축복’을 일깨워 주시는 분. 결핍에 힘겨워 하는 이들이 이 축복을 누리게 되길 다시 한번 기원한다. 일년 기약으로 시작한 연재가 어느덧 만기에 이르렀다. 내 일상의 경험을 중심으로 두서없이 적어간 잡문인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읽고 계셨다. 내 딴에는 ‘현실 속의 풀어쓰기’를 염두에 두고 노력했는데, 분에 넘치는 작업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변변찮은 글에 귀한 눈길 주신 것을 감사드린다.
■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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