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2010-03-21 11:48:09, Hit : 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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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세음(觀世音)과 보문(普門)

관세음보살.jpg



관세음(觀世音)과 보문(普門)

이 품의 이름이 뜻하는 바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관세음의 세(世)란 세간(世間)이니 처지가 서로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희망이 각각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으로 사람들 개개인이 끊임없이 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집합체인 사회 전체가 또한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음(世音)이란, 세상사람의 소리, 곧 사람들의 호소입니다. 세간의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목소리입니다.

관(觀)은 관찰 곧 주의해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본다’고 할 때는 무심하게 본다는 뜻이지만,

관(觀)한다고 할 때는 주의를 집중하여 능동적으로 자세히 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에 따라

처지에 따라 또는 그 성질에 따라 서로 다른 가지가지의 괴로움과 번뇌를 없애고 싶어하는 여러 사람의 호소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고, 알아서 각기 알맞은 가르치심을 주고 또한 각기 알맞은 구제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

곧 관세음(觀世音)입니다.

한편 능엄경에 의하면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5근(根:안․이․비․설․신의 다섯 감각기관) 가운데 귀의

작용이 제일 크고 예민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바세계는 귀의 청각을 통해서 법을 이해시키고

해탈하게 해야만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세계이므로 먼저 귀로 듣고 다음에

눈으로 보게 하는 순서에 의한 교화방편을 쓰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경에서는

“사바세계의 교체(敎體)는 음문(音聞)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세음보살의 명호(名號)가 사바세계의 교체에 맞춰 정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세음보살의 그 무한한 자비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보문(普門)의 보(普)는 골고루 널리 미친다는 뜻이고, 문(門)은 아무 걸림 없이 활짝 열려 있다는

뜻이니 널리 모든 사람에게 문을 두루 열어 놓았다는 뜻으로,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차별하거나 거부하는 일이 없이 평등하게 가르침의 문, 구제의 문에 들어 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관세음보살이 대비원(大悲願)으로 33신을 나타내어 널리 중생을 구원하므로 보문이라고 합니다.



천태대사는 법화문구에서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이라는 품 이름에 십쌍(十雙)이라

하여 열 가지 의미가 있음을 밝혔는데, 좀 장황하기는 하지만 그 열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첫째 것에 대해 논하건대 관세음은 인(人)이고 보문(普門)은 법(法)인데 인(人)에도

여러 가지 분류가 있고 법(法)에도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앞의 문답에 의해 관세음의 인(人)을

논하고, 뒤의 문답에 의해 보문의 법(法)을 논한 것이니 이 인(人)․법(法)을 합해서 제목을

삼았으므로 관세음보살보문품이라  이른다고 함이다.”

참고로 이 보문품의 구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장행(長行)과 게송(偈頌)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또한 장행(長行)의 경문은 전반부의 문답과 후반부의 문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글에서 ‘앞의 문답’이란 이 보문품의 첫머리에 무진의(無盡意)보살이 부처님께

“관세음보살을 왜 관세음이라고 부르나이까.”라고 여쭘으로 부처님께서 그 까닭을 말씀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관세음보살' 자체 곧 인(人: 주체)에 대해서 묻고 답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뒤의 문답’은 무진의보살이 부처님께 “관세음보살이 어떻게 사바세계에 노니시며 어떻게 중생을

위해 설법하시고 그 방편의 힘이 어떠하나이까.”라고 여쭘으로 부처님께서 그 보문의 법을 설하신

것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중생구제의 방편, 활동 곧 법(法)에 대해 묻고 답한 것을 말합니다.



“둘째로 관세음이란 대비(大悲)로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건져줌이니 앞의 문답에 의하건대 ‘백천의

고뇌가 다 해탈할 수 있게 된다.’고 하셨다. 보문이란 대자(大慈)로 중생들에게 낙(樂)을 주는

일이니 뒤의 문답에 의하건대 ‘그 제도할 바를 따라 법을 설한다.’고 하셨다.”

이 해석은 관세음을 고를 없애는 발고(拔苦), 보문을 낙을 주는 여락(與樂)에 맞춰서 해석한

것으로서 앞의 문답이란 품의 첫머리에 무진의(無盡意)보살이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어떠한 인연으로써 이름을 관세음이라고 하나이까.”라고 여쭘으로 부처님께서

“만약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있어 모든 괴로움과 뇌로움을 받을지라도,

이 관세음보살을 듣고 한마음으로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때에 그 음성을 관하여 모두

풀리어 벗어남을 얻게 하느니라.”라고 대답하신 것을 말합니다. 또한 뒤의 문답이란

관세음보살이 33신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는 것을 말하며, 이 설법하는 것이 바로 낙을 주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관세음이란 지혜장엄이니 지혜가 혹을 끊음이 새벽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보문이란 복덕장엄이니 복이 능히 수명(壽命)을 일으킴이 마니주가 보배를 비오게 함과 같다.”고 하였으며,



넷째로 “관세음이란 관(觀)이 경계(境界)와 계합(일치)함이니 이것이 곧 부처님의 법신(法身)이다. 보문이란

그 응하는 바에 따라 몸을 나툼이니 곧 부처님의 응신(應身)이다.”라고 하여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관세음보살은 구원본불(久遠本佛)이 중생구제를 위하여 방편으로 몸을 나투신

응화신(應化身)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섯째는 “관세음이란 약수왕(藥樹王)이 온 몸의 병을 무엇이나 고치는데 비유하고 보문이란

여의주왕(如意珠王)이 욕구하는대로 무엇이나 주는것에 비유한다.”고 하여 두 번째의

발고여락(拔苦與樂-고통에서 빼내어 즐거움을 줌)과 같은 의미를 말했습니다.



여섯째는 “관세음이란 남모르게 이익을 주어, 보고 들음이 없게 하되 삼독(三毒), 칠난(七難)을

다 떠나 이구양원(二救兩願)이 다 채워지는 일이다. 보문이란 드러내어 이익을 끼침으로서 눈으로

삼십삼의 성용(聖容)을 보고 귀로 십구의 존귀한 가르침을 듣는 일이다.”라고 하였고,



일곱째는 “관세음이란 자의(自意)를 따라 실지(實智)를 비추는 일이요 보문이란 타의(他意)를 따라

권지(權智)를 비추는 일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덞째는 “관세음이란 본제(本際, 진여의 절대적 경지)에서 움직이지 않는 일이요 보문이란

자취를 방원(方圓)에 남기는 일이다.”라고 하여 구원본불과 적불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홉째는 “관세음이란 근본은 요인(了因)의 종자요 보문이란 근본은 연인의 종자다.”라고 하여

우리 모두에게는 불성이 갖춰져 있으며, 노력에 따라서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관세음이란 구경(究竟)은 지덕(智德, 지혜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 깨닫는 것)이어서

십사야(十四夜)의 달빛과 같다. 보문이란 구경은 단덕(斷德, 지혜로 번뇌를 끊는 덕)이어서

이십구야(二十九夜)의 달의 그릇된 빛이 장차 다하려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여 관세음보살은

부처님보다는 못하지만 보른 전날의 달빛과 같이 지혜롭고 또한 그믐 전날의 달빛과 같이 번뇌가

소진된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앞에서와 같이 관세음을 지혜, 보문을 지혜에

의한 번뇌의 소멸에 비유함으로서 진정한 즐거움은 바로 번뇌의 소멸에서 오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 25장,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그 때, 무진의(無盡意)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다."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이름하나이까."

먼저 부처님께 질문을 하는 보살로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이 나옵니다.

무진의(無盡意)란 뜻이 다함이 없다는 뜻인데, 천태대사님은 의(意)란 지(智)라고 하였고,
무진(無盡)이란 공(空)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진의란 공(空)의 지혜, 곧 반야의 지혜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듯이, 약왕보살의 수행과 공양의 공덕으로, 자리(自利)를 이루고,
묘음보살의 가르침의 지혜에 이르러, 타화(他化)에 힘을 쓰는데, 그 바탕은 바로 반야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진의보살이란, 반야의 지혜를 깨우친 이로, 그가 부처님께 관세음보살의
본사(本事)를 물음은 바로, 깨달음을 얻은 이에게 있어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행(行)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음에 합장은 부처님께 귀의를 뜻하는 동시에 우리의 흐트러진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모든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갈라진 것을 한데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정신과 육체, 나와 남, 부처와 중생, 이상과 현실, 지혜와 자비가 하나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모든 괴로움을 받을 적에,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일컬으면, 관세음보살은 곧 그 음성을 관하고 다 해탈하게 하느니라.


어떤 이들은 이렇게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게 되는 것은 일단 자기의 죄업을 깨닫고 참회하여

불도(佛道)에 귀의하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했을 때, 고해를 벗어나서 스스로 고난을 해탈할

능력을 얻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곧 이런 생각은 관음신앙을 타력보다는 자력으로

이해하려는 합리적인 이성적 사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음신앙에서의

가피력(加被力)은 관세음보살의 위신력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범부

중생의 자성은 진여불성으로 관세음보살과 다름이 없긴 하지만, 설혹 우리의 마음이 자성의 눈을

뜨고 겨우 본성에 가깝게 접근했다고 하더라도 그 즉시 관세음보살과 같은 위신력(威神力)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관세음보살의 불가사의한 영험을 믿어야

합니다.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예송(禮誦)하는 천수경(千手千眼觀世音經)의

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는 관세음보살의 불가사의한 위신력을

밝힌 것으로 이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생각한 뒤, 이 대비심다라니를

외우면 ①오랜 생사의 중죄(重罪)가 멸하고, ②뜻하는 부처님의 땅에 태어나고, ③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④무량한 삼매(三昧)와 변재(辯才)를 얻고, ⑤구하는 바를 얻고, ⑥뜻대로 남자의

몸을 받고, ⑦참회할 길 없는 파법(破法)의 죄를 멸하는 등의 일곱 가지 뜻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진언(眞言)을 외우는 자는 15종의 좋은 생을 받고, 15종의 나쁜 죽음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중 15종의 나쁜 죽음은 ①굶어 죽는 것, ②형벌로 죽는 것, ③원수 손에

죽는 것, ④전쟁에서 서로 죽이는 것, ⑤짐승에게 물려 죽는 것, ⑥뱀에게 물려 죽는 것,

⑦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 죽는 것, ⑧독약에 의해 죽는 것, ⑨벌레 에 쏘여 죽는 것,

⑩미쳐 죽는 것, ⑪높은 데서 떨어져 죽는 것, ⑫악인 때문에 죽는 것, ⑬악귀 때문에 죽는 것,

⑭나쁜 병에 걸려서 죽는 것, ⑮스스로 목숨을 끊어죽는 것 등인데 이것은 보문품에 설해진

칠난삼독이구(七難三毒二救)의 12가지 극한상황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훨씬 더 확충하고

체계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법화경은 믿음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경전이지만, 불교에 들어온 자가 부처님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최대의 교만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불교에 들어왔다면 그것을

인연으로 하여 더욱 수행에 힘써 속히 부처의 몸을 이루어,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부처의 길로

이끌겠다는 일불승(一佛乘)의 이념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만의 평안과 해탈을

도모하는 소승의 무리는 볶은 씨앗처럼 절대로 성불이라는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불러서 믿음을 체험한 사람은 다시 한 걸음 더 들어가 아집과

분별망집(分別妄執)을 부정하는 철저한 수행(修行)에 힘써야 합니다. 분별망집이 공(空)한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나와 남, 안과 밖, 부처와 중생 등, 일체의 차별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곧

관세음이고, 관세음이 곧 내 마음입니다. 따라서 밖에서 비치던 관세음보살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해입상응(解入相應)이라 합니다. 밖에서 들어온

관세음보살(入)과 중생 본래의 마음(解)이 서로 하나가 된다(相應)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자는 마침내는 바로 그 관세음보살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본래 청정한 마음의 관세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부름에 능히 응하는

응신(應身)으로서의 관세음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법화경 보문품의 33응신은 중생의 견지에서 볼 때는 관세음보살이 중생구제를 위하여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응현(應現)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법화경은 보살을 가르치기 위한

법입니다. 따라서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보문품의 33응신은 보살들에게 그런 응신을 나타내어

중생을 건지라는 간곡한 교시(敎示)로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관세음을 생각하고 부르라'는

말에는 관세음보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만이 아니라,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은 모든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에서 적극적인 선업(善業)에로, 거기서 다시 아집(我執)의 철저한 부정을

뜻하는 대승 공관(空觀)의 실천에로, 그리하여 또 다시 큰 자비의 구제활동에로 승화될 것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일심창제, 일심염불, 일심칭명

앞에서 우리는 올바른 신앙이란 감응도교(感應道交), 해입상응(解入相應) 그리고 마지막으로

응화(應化)이어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불도 수행의 중심은 기도와 참회에 있고 지극한

기도를 일심으로 하여 삼매의 경지에 이르면 부처님의 마음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보통 때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힘이나 지혜가 생겨나게 됩니다.



따라서 감응도교를 이루는 바탕이 되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다만 입으로만 소리를 내어

부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몸(身)으로 행하는 것, 입(口)으로 말하는 것, 마음(意)으로 생각하는 것, 이 세 가지의 행동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입으로 말하면 마음에 생각하고, 마음에 생각하면 그것이 몸으로

행하는 행동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입의 소행은 몸의 소행과 마음의 소행에 서로 통합니다.

법화경을 믿는 사람이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부름으로써 그 소리가 귀로 들어오고, 귀로 들어온 소리가 자기의 마음을

움직여서 청정하게 되어, 마음이 거룩한 가르치심으로 향하게 되고 감응도교가 발생하여 공덕과

가피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냉정하게 한번쯤 살펴보아야 할 것은 과연

불교에서만 이러한 영험이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인데 기독교 신자들도 신앙간증을 통해 자신이

받은 기적적인 영험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간증자들이 많을수록, 기적적인

영험을 받은 신도들이 받을수록 그 교회의 교인의 수는 늘어갑니다. 그래서 부흥회라고 해서

그러한 감응도교(感應道交)를 집단적으로 유발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무속신앙을

통해서도 영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상의 사실을 미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마음을 일심으로 하고 누군가를 향해 간절히

기원하면 그 사이에 감응도교(感應道交)가 이루어져 가피(加被)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이 지구상에 무수한 종교와 무속신앙이 발생한 근본 배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왜 불교인가, 그리고 어떠한 불교이어야 하는가를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 뛰어나고,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가르침이며, 그 가르침은 우리의 모든 고통을 덜 수 있는 가장 바르고 빠른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불교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음신앙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화신앙도, 미륵신앙도,

정토신앙도, 지장신앙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인연과 근기에 따라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일심으로 창제(唱題), 칭명(稱名) 또는 염불(念佛)을 합니다.

여기서 창제(唱題)는 법화신앙에서 법화경의 제목을 부르는 것이고,

칭명은 관음신앙 또는 지장신앙에서 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며,

염불은 정토신앙 등에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법화행자들이 칭명이나 염불보다는 창제를 위주로 하는 것은 법화경이 곧 구원본불의

법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법화경의 글자 한자 한자가 바로 부처님의 색신(응신)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경에는 무량한 공덕과 가피력이 있으며,

또한 법화경의 일불승(一佛乘)이라는 원리가 모든 부처님(三世諸佛)을 이루는 큰 길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가르침보다도 법화경의 가르침이 바르고 뛰어나다며,

빠른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일련대사는 이르기를 “이제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행자 등 권속이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봉창하는 것은 관음(觀音)의 이익보다 천지운니(天地雲泥)의 차인 것이다. …… 관음이 이미

법화경(妙法蓮華經)을 정수(頂受)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이 경(妙法蓮華經)의 수지(受持) 행자(行者)는

관세음의 이익보다 월등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해석하자면 보문품은 법화경의

한 품에 불과하고, 또한 관세음보살은 구원본불의 화신으로 창제(唱題)와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칭명(稱名) 사이에는 하늘과 땅, 구름과 진흙처럼 그 공덕(功德)에서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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